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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과천시지회 장성 필암서원(長城筆巖書院) 탐방-(2/2)
날짜 2017-11-20 count :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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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향한 장성 필암서원(長城筆巖書院) 탐방-(2/2)

(2017/11/17 현재)


전통 문화의 산실 과천 향교와 유도회 과천시지회 회원들의
선현지 견학 탐방 일환으로 실시한 장성 서삼면 추암마을 인근에
축령산 편백나무 치유의숲 입구 탐방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향한 장성 필암서원(長城筆巖書院) 방문 전경 입니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 에 있는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배향인물로 '하서 김인후'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세우고
있으며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필암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장성군 황룡면에서
태어났습니다. 퇴계 이황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한 후 31세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홍문관 박사 겸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 시절을 보내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르쳤던 인종이 죽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벼슬을 마다하고 충절을 지키며, 오로지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여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필암서원은 이러한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워졌으며, 김인후가 죽은 후 30년이 지난 1590년,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당을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그러나 7년만에 정유왜란으로 서원이 소실되자, 1624년 황룡면 증산동에 새로 옮겨
세웠으며, 현종으로부터 '필암(筆巖)'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된 것은
새로지은지 35년만의 일입니다. 지금의 위치에 서원이 옮겨진 것은 그 후의 일로, 1789년
양자징도 함께 모셔지게 됩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위기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냈으니 절개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성 필암서원 (長城 筆巖書院)

 
-종 목 사적  제242호 
-지정(등록)일 1975.04.23
-소 재 지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379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필암서원 → 장성 필암서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장성 필암서원-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사적 제242호이다.


▶개요

필암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90년(선조 23년) 제자 변성온(卞成溫)ㆍ기효간(奇孝諫)ㆍ변이중(邉以中)등 호남 선비들이 그의 고향 마을 인근 장성읍 서쪽 기산리(岐山里)에 세웠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 되었으나, 1624년(인조 2년) 추담 김우급(金友伋)등 지방 선비들의 노력으로 기산리(岐山里)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복설하였다.

1658년(효종 9년) 복설 이후 서원의 지위 고양을 위한 전라도 유생 오이익(吳以翼. 오희길 종질)을 소두(疏頭)로 한 사액(賜額) 청원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659년(효종 10년)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실제 선액(宣額)은 3년 뒤에 이루어졌다.

1662년(현종 3년) 현종이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宣額)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禮官)으로 보내 사제(賜祭)를 올렸다. 이로써 필암서원은 경제력을 확보하여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높힐 수 있었다.

1672년(현종 13년) 3월 사액(賜額) 서원답게 면모를 일신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현재의 위치인 해타리(海打里)로 이건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필암리(筆岩里)로 바뀌었다. 이건(移建)은 원장 송준길(宋浚吉)의 협조와 남계 이실지(李實之. 1624~1702)ㆍ기정연(奇挺然. 1627~?)ㆍ박승화(朴升華. 백우당 증손)등의 노력으로 완성하였다.

 

1786년(정조 10년)에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 1532~1594)을 추가 배향(配享) 하였다.

서원의 이름을 '필암'(筆巖)이라 지은 것은 그의 고향마을 대맥동 입구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 김인후가 태어났다고 하며, 바위에는 병계 윤봉구(尹鳳九)의 글씨로 「필암(筆巖)」이라 두 자가 조각돼 있다.

서원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뒤를 감싼 가운데, 평지에 자리 잡아 교육과 학문하는 공간을 앞쪽에, 선현들에 대한 제사 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다. 또 강학 공간인 강당이 사당을 향해 북향하고 있는 구조로 북쪽면의 기둥 사이에 벽을 설치하지 않고 비워 놓은 점이 점이 특이하다. 그밖에 장서 공간과 지원시설 공간이 있다.

 

필암서원(筆巖書院)은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서원으로,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필암서원문서일괄(筆巖書院文書一括. 노비보, 원장선생안, 집강안, 원적, 봉심록, 서원성책 등) 및 인종(仁宗)이 하서(河西) 선생에게 하사한 『묵죽도(墨竹圖)』와 『하서유묵(河西遺墨)』 등 60여건의 자료가 여전히 남아 있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치된 47개 서원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나, 6·25사변 때에도 피해를 면한 서원으로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호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지정되었다가, 1975년 4월 23일 사적 제242호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필암서원(筆巖書院)은 사액(賜額)서원으로서 호남지방 유학의 총본산이며, 호남사림들의 기풍 진작과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 시설


-확연루(樓然廓)-정문

 

서원의 문루(門樓)인 '확연루'(廓然樓)는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 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입・출문이고, 2층 문루는 유생들의 휴식 공간이다. 문루의 편액(扁額) 확연루(樓然廓)의 ‘확연(樓然)’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거리낌 없이 넓게 탁 트여있고 크게 공정하다』는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집자(集字)한 말로, 《확연루기(樓然廓記)》에 '확연루'(樓然廓)라 이름을 지은 연유에 대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 했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해 확연하며 크게 공정함으로』 두 글자를 특별히 차용(借用)하였다. 편액(扁額)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썼다.


-청절당(淸節堂)-강학당

 

확연루를 지나면 강학 공간인 ‘청절당'(淸節堂)이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옛 진원현 객사 건물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청절당(淸節堂)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쓴 하서 선생의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며, 편액(扁額)은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청절당'(淸節堂) 강당 처마에는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데, 병계 윤봉구(尹鳳九)의 글씨이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여있다.

진덕재(進德齋)ㆍ숭의재(崇義齋)-기숙사

청절당 양 옆으로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재(東齋) '진덕재'(進德齋)와 서재(西齋) '숭의재'(崇義齋)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편액(扁額)도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글씨이다.


-경장각(敬藏閣)

 

청절당 앞에는 서원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 가득한 '경장각'(敬藏閣)이라는 건물이 있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내탕금으로 세우도록 한 건물로, 이곳에는 1543년(중종 38년) 인종(仁宗)이 세자 시절 하서 김인후에게 손수 그려 하사한 ‘묵죽도(墨竹圖)’ 목판이 소장돼 있다. 이 ‘묵죽도(墨竹圖)’는 훗날 하서 김인후의 높은 절의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액호(額號)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어필(御筆)이다.


-우동사(祐東祠)-사당

 

경장각 뒤의 내삼문을 통과하면 제향 공간인 사당 ‘우동사'(祐東祠)가 있는데, 북벽에는 하서 김인후를 동벽에는 고암 양자징(梁子澂)을 향사하고 있다. 우동사(祐東祠)의 의미는 '하늘의 도움(祐)으로 인하여 우리 동방에 태어난 이가 하서 김선생이다'는 뜻이다. 편액(扁額)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집자(集字)·집획(集劃) 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서쪽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장판각(藏板閣)-문서고

 

우동사(祐東祠) 사당 동쪽 담넘어에는 ≪하서선생 문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5호) 목판을 비롯하여 '초서천자문', '백련초해', '해자무이구곡' 등의 전적(典籍)과 문서(文書)를 수장하고 있다.


-기타

 

동재 진덕재 앞에는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등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와 계생비(繫牲碑)가 있다. 노비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한장사'(汗丈舍)도 있다.


-역사적 가치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 사이에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비 사업

 

1999년부터 장성군에서 『필암서원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2008년 유물 전시관인 '원진각'(元眞閣)과 '삼연정'(三然亭)등을 준공하고 정비하였으며, 이후 2010년 청소년ㆍ유림들의 한학교육 및 선비 체험 교육 공간 목적의 '집성관'(集成舘)도 준공하였다. 집성관(集成舘) 안에는 숙박과 선비체험 프로그램 시설인 '진덕원'(進德院)과 '숭의관'(崇義館) 등이 갖추어져 있다.

 

-봉행

 

장성 필암서원에서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와 추향제(秋享祭)가 매년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각 기관ㆍ사회 단체장ㆍ유림ㆍ주민들의 참석 하에 열리고 있다.


-관련 문화재


필암서원 문적 일괄 - 보물 제587호,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5호
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6호

 


●김인후-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ㆍ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이력

 

김인후(金麟厚)는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참봉 김영(金齡)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聰明)하였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5~6세 무렵부터 전라도 일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이황(李滉)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고 다음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홍문관 저작(著作), 홍문관 박사(博士) 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 세자가 그려준 ≪묵죽(墨竹)≫ 한 폭과 그의 화제(畵題)는 군신 사이의 모범적인 정의(情誼)라 칭송되었다.

1543년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이 되어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처음으로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다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그해 12월 옥과 현감(玉果 縣監)으로 나갔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이듬해 인종(仁宗)이 즉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누차 성균관전적·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매년 인종(仁宗) 기일인 7월 1일이 되면 집 앞 남쪽 ‘난산(卵山)’에 올라 밤새도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평생 한결같았다.

1558년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이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해 논쟁을 벌이자,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여 기대승의 주정론(主情論)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는데, 퇴계(退溪)는 그의 뛰어난 견해에 미칠 수가 없다며 극찬 하였다.

 

1559년 겨울 고봉(高峯)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강론했는데, 고봉이 퇴계(退溪)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이기호발(理氣互發)」설에 대해 의심하여 질문하니 분석(分析) 논변(論辨)하기를 극히 투철(透徹)하고 정밀(精密)하게 해주었다. 이와 같은 소득을 얻은 고봉(高峯)은 그가 죽은 후 퇴계(退溪)와 「사칠호발(四七互發)」에 대해 강론할 때 그의 설을 근본으로 하여 이를 밝히니 수만 언(言)에 이르렀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이황ㆍ기대승'의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이다.

그리하여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 도의 지교를 맺고, 면앙정의 누정을 중심으로 당대의 유명한 송순을 비롯한 호남의 많은 사림계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호남 시단 형성 및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560년(명종 15년) 1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떠나는 그 순간에도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자녀들에게 명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마지막까지 선비다운 굳은 절개와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다.

그는 조예가 초월하고 기상이 호매하여 도학(道學)·절의(節義)·문장(文章)을 겸비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며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도학(道學)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지 않으나, 시문에 능해 10여권의 시문집과 『하서집(河西集)』ㆍ『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ㆍ『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ㆍ『백련초해(百聯抄解)』등의 저서가 있다. 제자로는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정철(鄭澈)·오건(吳健)ㆍ양자징(梁子徵) 등이 있다.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 되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 兼 令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정조 20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

 

김인후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그의 5대조 조선 개국원종공신 김온(金穩)이 서울에서 살았으나, 태종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 때 처가인 여흥 민씨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 정부인 여흥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전라도 장성으로 낙담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

 

1510년(중종 5년) 7월 19일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영(金齡)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하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두터워 부친 참봉공의 사랑이 더 하였다. 5∼6세에 이미 문자를 이해하고 말을 하여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수학

 

1514년(중종 9년) 5살 때 부친 참봉공이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는데, 눈여겨보기만 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자 참봉공이 화를 내며 「자식을 낳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벙어리인 모양이다. 집안이 말이 아니겠구나.」 하였다. 얼마 후에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벽에 글을 쓰는데 모두 ≪천자문(千字文)≫에 있는 글자였다. 그래서 참봉공은 비로소 기특히 여기었다. 또 일찍이 아는 사람과 시를 짓는데,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하루는 생파를 손에 들고 겉껍질에서부터 차근차근 벗겨 들어가 그 속심까지 이르고서야 그치니, 이를 본 참봉공이 장난삼아 하는 줄로 알고 나무라자, 그는「자라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515년(중종 10년) 6살 때 정월 보름달을 보고 「상원석(上元夕)의 시를 지었다. 또 어떤 손님이 와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천(天)자로 글제를 삼아 시를 지어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하 크고 또 가물가물, 넓고 넓어 비고 비어, 지구 가를 둘렀도다. 덮어주는 그 중간에, 만물이 다 들었는데, 기나라 사람들은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지.』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래며 특이하게 여기었다.

 

1517년(중종 12년) 8살 때 조광조의 숙부 조원기(趙元紀)가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보고 기특히 여기며 더불어 시를 짓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신동(長城神童) 천하문장(天下文章)」이라 칭찬했다.

1518년 (중종 13년) 복재 기준(奇遵)이 남녘 시골에 내려왔다가 그의 이름을 듣고서 데려다 보고 칭찬을 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世子)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사필(內賜筆)」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고 보배로 삼았다.

 

1519년(중종 14년) 10살 때 호남 관찰사로 와 있던 김안국(金安國)을 찾아뵙고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나의 소우(小友)이다.」고 하였으며, 그리고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1522년 (중종 17년) 시를 잘 짓던 그는 스스로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설 수가 없다.(不學詩無以立)」는 말을 성인의 교훈으로 생각하고, ≪시경(詩經)≫을 탐독하였다.

 

1526년 (중종 21년) 송순(宋純)을 찾아가 뵙고 수업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왕래하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7년 (중종 22년) 18세 때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崔山斗)를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는데, 신재는 깊이 탄복하여 매양 「추수 빙호(秋水 氷壺.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 같다)」라고 일컬었다. 또 나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광주 서창에 돌아와 있던 박상(朴祥)을 찾아뵙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이와 같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문을 잘하여 명성이 전역에 떨쳤으며, 기묘 사림의 조원기ㆍ기준ㆍ박상 등의 아낌을 받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안국ㆍ최산두ㆍ송순 등에게 도학과 문학을 배웠다.

 

-학맥과 사상

 

이와 같이 그는 조원기·기준·송순등과 사우 관계를 맺고, 김안국ㆍ최산두에게 수학하였는데 그들은 기묘년에 화를 당한 인물들로 그가 결코 기묘사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스승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바, 김굉필은 바로 정몽주ㆍ길재ㆍ김숙자ㆍ김종직 순의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인물로 그는 도통의 직계이며, 조광조와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따라서 그는 조광조(趙光祖)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등 기묘 사림을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의 신원 복원을 주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

 

1528년 (중종 23년)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에게 칠석날 기리는 시험을 보였는데, 그는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대제학 이행()이 기특히 여기며 사람이나 글이 모두 옥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혹시 남의 손을 빌리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그를 성균관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시문의 운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은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그때 지은 시권 《칠석부(七夕賦)》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렸다.

 

1531년 (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1]

1533년 (중종 28년)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이황과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은 소득이 있었다. 후일 퇴계(退溪)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河西)'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그와의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退溪)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주었다.[2]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 (중종 31년)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머리에 가마(加麻) 띠를 두르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며 1년 상에 미쳐서는 제문을 지어 스승의 영전에 바쳤다.〔우리나라에서 스승을 위해 상복을 입은 것은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

1539년 (중종 34년) 여름 4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이미 제술관을 많이 뽑았사오나, 성균관 과시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김인후 등을 차출하여 이에 대비케 함이 어떠하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 하였다.

1540년 (중종 35년) 10월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다.

1541년 3월 홍문록(弘文錄)에 뽑히다. 4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 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함께 뽑힌 12인과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을 만들어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통해 학문을 닦았다. 겨울 10월에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정경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3]

 

1542년 (중종 37년) 가을 7월에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이 되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맡는 요직인 청요직에 올랐다.

1543년 (중종 38년) 1월 7일 동궁에 불이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봄 2월에 스승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가마(加麻)를 하고 기일(忌日)에도 역시 재계(齋戒)하였다. 스승을 애도하는 글 '만사(輓詞)'가 문집에 전한다.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兼世子侍講院) 설서(說書)가 되어 동궁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 보도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니,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 다하고, 자주 불러 강론을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또 그가 입직해 있을 때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세자는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표현하고자 아니하였는데 유독 그에게 손수 그린 『묵죽도』(墨竹圖)를 하사하여 뜻을 보였다. 이것은 임금 될 사람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다. 이후에도 『주자대전』(朱子大全) 한 질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와 같은 인종의 그에 대한 신뢰와 배려는 충성심으로 굳고 깊게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 일화는 군신 관계의 모범으로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4]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

 

1543년 (중종 38년) 여름 6월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승진되었다. 그해 동궁에 불이 나는 등 전국이 뒤숭숭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홀로 개연히 상소문을 올려 중종에게 수신·자성의 도를 진술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바른 선비들을 《소학(小學)》의 무리라 하여 배척하는 낡은 정치 풍토가 만연해 있는 조정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을 것과, 기묘년에 희생된 사람들이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인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거운 죄를 입었습니다. 그 후에 죄를 지은 사람 중에 비록 죽어도 남은 죄(大逆不道)가 있는 자들이 세월이 오래되어 더러는 복직된 자도 있사온데 기묘년 사람들은 오히려 상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사오니, 신은 홀로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기묘년 사람들이 숭상하던 ≪소학(小學)≫, ≪향약(鄕約)≫ 등은 버려지고 쓰지 아니합니다. ≪소학≫과 ≪향약≫은 성현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비들이 시속에 빠져 읽어서는 안 될 글이라 하며 버리니 매우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지적 하는데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때는 기묘년 으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언급한 것은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이는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5]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8월에 양친의 연로를 들어 돌아가 봉양할 것을 간절히 청원하여 귀향하였다. 퇴계 선생은 시를 지어 송별했다. 겨울 12월에 걸양(乞養)을 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 현감을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6] 이때에 송인수(宋麟壽)가 호남관찰사로 와서 그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받으며 정이 매우 두터웠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그가 가르치던 세자가 인종으로 등극하여 처음으로 성리학 숭상과 현량과를 복원하고, 기묘년에 희생된 선비들인 조광조ㆍ김정ㆍ기준 등의 신원을 복원하였다.

 

1545년 (인종 원년) 중종이 승하하자 여름 5월에 조정에서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에 드디어 나아갔다. 당시 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내외가 모두 태평성대를 기대했으며, 그에게 인종의 경연의 보도 책임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인종이 건강을 잃자 그는 의약에 함께 참여하기를 청한 바, 약원에서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그는 세상의 기미(幾微)가 반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부모 병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사직과 은거

 

1545년 (인종 원년) 가을 7월 인종이 등극한지 8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매우 깊은 심장병이 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술과 시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7]

 

1546년(명종 원년)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뿐이었다. 4월에 ≪효경간오(孝經刊誤)≫ 발문을 지었는데, 이는 옥과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유희춘(柳希春)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 읍에 들러 주자(朱子)의 「효경간오」(孝經刊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하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러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1548년 (명종 3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鮎巖村)에 우거하며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訓蒙)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 점암은 나무와 돌이 빼어나게 좋으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고암 양자징(梁子澂)을 비롯한 제자들과 더불어 바위에서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大學巖)이라 일컬으며, 또 상류에 낙덕암(樂德巖)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과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인종에 대한 절의

 

이후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節義)'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조정에서 성균관 전적·홍문관 교리·성균관 직강 등의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앞 '난산(卵山)'에 들어가 곡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와 「조신생사(吊申生辭)」의 시를 지었다.

 

1547년 (명종 2년) 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가을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또 가을 9월에 전라도 도사(全羅道 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사헌부 반대로 체직되었다. 체직 다음날 18일에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 사림계 인사들이 극형에 처해지고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사상적 동지요 절친한 벗들로 그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8]

 

1549년(명종 4년) 여름·가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12월에 장성 맥동 본가 서쪽 원당산에 장사하였다. 묘지명은 송순이 썼다. 1550년(명조 5년) 가을에 장성 본가로 돌아왔다. 묘사 거실의 편액을 ‘담재’(湛齋)라 하고, 이를 자호로 하였다. 1551년(명종 6년) 6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참봉공 묘 왼편에 장례 하였다.

1553년(명종 8년) 7월에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는 홍문관 교리(館校館 校理)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에 임명되어, 부름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글을 올려 병으로 사직을 청하고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54년(명종 9년) 늦가을 9월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셨다. 10월에 명종은 감사에게 특명을 내려 「식물을 제급케 하고, 병이 낫거든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그는 글을 올려 사양했다.

1555년(명종 10년)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생애 후반>

 

생애 후반은 을사사화 이후 시기로, 하나는 성리학(性理學) 연구이고, 다음은 시문학(詩文學) 활동이며, 나머지는 후학 양성(後學 養成)이다.

 

-성리학 연구

 

을사사화 이후 은둔한 그는 몸을 추스른 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학문의 경지가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깊었다. 또 그의 학문 기조는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49년(명종 4년) 봄 2월에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대학 강의(大學 講義)≫를 얻어 보고 발문을 지었다.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天命道)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여 ≪천명도≫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받아 본 그는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하여 주었다. 이는 뒷날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 논변」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으며, 일찍이 이황도 역시 그의 도학 문자를 보고 의견과 해설의 정밀함에 대해 깊이 공경하였다.

 

1552년(명종 7년) 양산보(梁山甫)가 ≪효부(孝賦)≫의 장편을 지어서, 그가 일찍이 시운을 따라 글을 지었는데, 송순이 직접 생각을 정리하여 원 글의 뒤에 품평하였다. 문집에 실려 있다.

 

1556년 (명종 11년) 화담 서경덕(徐敬德)은 '심학'(心學)으로써 당시 숭상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는 일찍이 「독주역시(讀周易詩)」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이니 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차운하였다. 이는 서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단번에 깨달음을 얻으려는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그의 시에 화답을 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1556년 여름 5월에 무장 고을 유생 안서순(安瑞順)이 정륜(鄭倫), 김응정(金應貞)과 함께 상소하여 을사년에 무고함을 입은 명현의 원통한 상황을 진술하여 아뢰는데, 윤원형이 안서순과 나주출신 정륜은 모의하여 역적을 두둔한 죄로 참형하고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진사 김응정(金應貞)은 소장을 썼다하여 멀리 귀양을 보냈다. 또 윤원형이 기필코 그를 연루시켜 사림에 화를 씌우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1557년(명종 12년) ≪태극도설(太極圖說)≫ ≪서명(西銘)≫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서 읽기를 천 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와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서 보이기를 「염계의 도설은 도리가 정미하여 글월은 간략하되 뜻은 만족하고, 장자의 명은 규모가 광활하여 뜨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니 만약 천자가 고명하면 먼저 태극에서부터 공력을 써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서명을 이해하고서 태극에 미처 가야 한다.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법도이니 요컨대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아니 된다.」라 하였다. ≪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 은 잃어버려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1558년(명종 13년) 겨울 당시 기대승(奇大升)이 이항(李恒)에게 들러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하는데, 이항이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삼으므로」 기대승은 그르게 여기어 종일토록 토론하였으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기대승은 그를 찾아뵙고 분별하기 어려움 들어 질문하니, 그는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 하며 고봉더러 옳다 하고 하루 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또 노수신(盧守愼)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주해를 저술하여 이황 및 그에게 강의하고 질문한 것이 왕복으로 묶어 수백 언 이었는데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그의 설을 많이 따랐다.

 

여기서 노수신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채구봉(蔡九峯)의 ≪홍범설시도설(洪範揲蓍圖說)≫은 밝고 또 차비한데도 뒷사람이 오히려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그는 채구봉의 설로 근본을 삼고 자기의 설을 부가하고 진술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새로 만들어 이름을 ≪홍범설시작괘도(洪範揲蓍作卦圖)≫라 하고, 제자 양자징에게 전수하니 이에 '주·채(朱蔡: 朱子蔡沈)'가 전수한 깊은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1559년(명종 14년) 일재가 "태극과 음양이 일물이라"는 뜻을 철저하게 논하여 고봉을 통해 글을 보내자, 그는 일재에게 편지를 보내, "기군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은 아니나, 대개 이와 기는 혼합하여,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다 그 속으로부터 나와서 각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일러서는 아니 되겠지만, 그러나 도기의 나눠짐이 한계가 없지 못할진대 태극과 음양은 아무래도 일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며, 주자는 말하되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을 탄 것과 같은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고봉이 퇴계에게 질문하자 퇴계는 『담옹(하서의 별호)이 비록 적적하게 두어 마디 말을 했으나, 역시 이미 그 말의 본 뜻이나 내용을 보았다 하겠다.』고 하였다.

그해 겨울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던 고봉이 매양 그에게 나아가 의리를 토론하였다. 고봉은 퇴계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 에 대해 깊이 의심하여 그에게 질문하니, 그는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이에 고봉은 그에게 이와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퇴계에게 받들어 드렸던 것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고봉은 퇴계와 더불어 사칠 호발의 시비에 대해 왕복 변론한 것이 자못 수 만언이었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구별한 것이었다. 이후 고봉은 그 동안의 설을 다 버리고 1566년 병인년에 도리어 퇴계의 설을 따랐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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